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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 치료제는 가장 흔한 처방 약 중 하나로, 우리나라 성인의 3명 중 1명이 고혈압을 앓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시장 규모를 자랑합니다. 20세기 후반 제대로 된 고혈압 치료제의 탄생과 함께 심장질환과 뇌졸중에 의한 사망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현대인의 수명에 큰 역할을 하는 고혈압 치료제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혈액의 흐름에 대한 오해
역사적으로 고혈압이라고 불리는 병에 대한 치료법은 상당히 원시적이었습니다. 혈액을 뽑거나 거머리를 적용함으로써 혈액의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로마의 의사 코넬리우스 셀수스, 그리스 의사이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주장되었습니다.
또한, 혈액의 순환에 대한 오해가 약 1400년 동안 믿어지고 있었는데, 로마 시대 의사인 클라우디우스 갈레누스의 학설이 서양 의학계에서 절대적으로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레누스 학설에 따르면 심장에서의 혈액의 흐름은 심장의 우심실에 혈액이 들어온 후 좌심실에서 구멍을 통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오해들로 고혈압에 대한 이해는 근대까지도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심장과 혈액순환의 원리
영국의 의사 윌리엄 하비가 이러한 오해를 뒤엎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1628년 발표한 혈액의 순환 원리를 시작으로 심혈관계의 이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비는 뱀을 해부해서 대동맥을 묶으면 심장에 피가 고이고, 대정맥을 묶으면 심장에 피가 비어버리는 것을 관찰하며, 대동맥과 대정맥의 흐름을 통해 혈액이 심장을 중심으로 순환한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혈액의 순환을 위해 동맥과 정맥이 모세혈관을 통해 만난다는 것까지는 당시 기술의 한계로 풀지 못해 과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마침내, 1660년 네덜란드의 안토니 반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을 발명하며, 바로 다음 해인 1661년 이탈리아 해부학자 마르첼로 말피기가 현미경을 통해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모세혈관을 발견하면서, 하비의 주장이 정확하게 맞았음이 인정되었습니다.
1836년 영국의 의사 리차드 브라이트는 처음으로 고혈압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고혈압의 2차 증상인 심근 비대와 신장 질환 사이의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그 후 신장 질환은 그의 이름을 따서 종종 브라이트 병이라고 불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브라이트도 신장 질환과 심근 비대가 연관이 있는 이유를 당시에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훗날 영국의 의사 사무엘 윌크스가 고혈압이 신장 질환과 심근 비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혈압계의 발달
영국의 성직자 스테픈 해일스가 1733년 혈압을 측정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표하며 혈압 측정의 시대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방법은 동맥에 유리관을 삽입했을 때, 치솟는 혈액의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이었는데, 유리관을 삽입한다는 방법 자체가 사람에게 적용하기에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1905년에 러시아 의사 니콜라이 코로트코프가 청진 혈압계를 개발했습니다. 이 혈압계는 팔을 압박하여 혈액의 흐름을 막았다가, 이 압박을 풀며 막혔던 혈액이 분출되면서 혈관 벽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를 청진기로 들으면서 혈압을 측정하는 원리를 사용합니다. 처음 소리가 나는 때와 소리가 멈춘 때를 측정하며 수축기, 이완기를 모두 측정이 가능했으며, 이 혈압계의 원리는 오늘날 사용하는 혈압계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이 혈압계의 등장 이후 혈압 측정이 간편해짐에 따라, 고혈압의 치료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초기의 고혈압 치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까지도 고혈압을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치료법이 사용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중에서 효과적인 치료법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사용된 치료법에는 엄격한 나트륨 섭취 제한, 교감 신경계 일부의 수술적 절제를 통해 흥분했을 때 혈압 상승을 차단하는 방법, 열병을 일으키는 물질을 주입해서 열에 의해 혈관이 이완되어 간접적으로 혈압을 감소시키는 방법인 파이로젠 치료가 있었습니다.
1900년에는 고혈압을 위한 최초의 화학물질인 싸이오사이안산 나트륨이 나왔지만, 많은 부작용 때문에 인기가 없었습니다. 교감신경 억제제와 신경절 억제제 등도 나왔지만, 모두 부작용으로 큰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루스벨트의 고혈압
괜찮은 고혈압 치료제가 나오지 않았기에, 고혈압은 그냥 방치되는 병으로도 취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망 사건입니다.
1937년 54세의 나이에 그의 혈압은 162/98 mmHg의 높은 수치였지만, 안타깝게도 개인 주치의인 로스 매킨타이어 제독으로부터 혈압을 줄이기 위한 치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의학적 지식으로도 고혈압은 치료하는 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41년 루스벨트의 혈압은 188/105 mmHg를 기록했으나 여전히 적절한 치료 없이 진정제와 마사지만이 처방되었습니다.
1944년 재선을 앞두고 루스벨트의 건강 악화가 쟁점이 되며, 그가 계속 재임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언론의 추측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호흡곤란, 무기력증, 졸음 등의 여러 심부전의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1944년 62세의 루스벨트가 재선에 성공했을 때의 혈압은 200을 기록했습니다. 몇 달 후, 얄타 회담 전인 1945년 2월에는 무려 260/150mm Hg를 기록해, 실제로도 그가 얄타 회담 당시에도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이는 자료와 증언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후 2개월 뒤인 1945년 4월 63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임기 중 사망이었기에 고혈압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치료받지 않은 고혈압의 사례로 종종 언급되고 있습니다.
획기적 고혈압 치료제의 개발
루스벨트 사망 이후로 높아진 고혈압에 대한 경각심으로 고혈압 치료제 개발에 전 세계 제약사들도 크게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 드디어 경구 이뇨제가 개발되면서 고혈압 치료제의 획기적 돌파구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약은 소변의 양을 늘려 혈장의 양을 감소시켜서 혈압을 낮추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획기적 고혈압 치료제는 베타 차단제입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블랙이 1960년대 초에 개발한 베타 차단제는 초반에는 협심증에 사용되었지만, 임상연구를 통해 이 약이 혈압도 낮추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임스 블랙은 이 공로로 1988년에 그의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1950년대 이후 개발된 이뇨제와 베타 차단제를 시작으로, 현재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한 여러 고혈압 치료제들이 끊임없이 출시되며, 고혈압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루스벨트처럼 치료조차 하지 않는 병이었지만, 현재에는 충분히 관리될 수 있는 병으로 바뀌며, 많은 인류의 수명 연장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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