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닌(말라리아 치료제)의 역사 (feat.로마 제국의 비밀) :: 쉽게 풀어쓰는 약의 역사, 약 이야기
  • 2023. 11. 10.

    by. 약에 대한 정보공유

    퀴닌은 말라리아 치료제로, 말라리아가 흔한 질병이 아닌 현대의 선진국에서는 친숙한 약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말라리아는 에이즈, 결핵과 더불어  '세계 3개 감염병'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면역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아이들, 특히 아프리카 어린이들 중심으로 매년 수억 명이 이 병에 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병으로 매년 100만 명 이상이나 사망할 정도이니 말라리아는 현재진행형의 감염병임이 틀림없습니다. 퀴닌이 이 말라리아의 역사적 첫 치료제입니다. 아스피린이 버드나무 껍질에서 그 역사가 시작한 것과 유사하게, 퀴닌도 한 나무껍질에서 이 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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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리아란

    말라리아는 '얼룩날개모기'인 아노펠레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빨 때, 침과 함께 말라리아 원충이 혈액으로 침투해서 발생하는 병입니다. 침투한 이 말라리아 원충은 간세포로 들어가 증식 후, 적혈구 세포에 들어가 적혈구를 파괴하면서 헤모글로빈을 먹습니다. 이 때 이 헤모글로빈을 소화하면서 독성 물질이 생기면서 이 독성 물질이 몸에 방출되면서 심각한 고열 등의 증상이 발생합니다. 심한 경우는 사망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이 버틸 수 있었던 비밀

    19세기까지 말라리아는 열대지방, 서아프리카에서 번성했음은 물론, 유럽에서도 번성했습니다. 특히 남유럽 전역,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심각하게 번성했습니다.

    '신곡'을 지은 이탈리아 시인 단테도 말라리아로 사망했습니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를 침략하러 온 훈족이 교황의 회유로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이탈리아의 말라리아가 너무 심각해서 철수했다는 숨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게르만 민족의 수많은 공격에 버틸 수 있었던 큰 이유도 극심한 말라리아 덕분에 침략하러 온 게르만 민족이 번번히 후퇴한 이유도 크다고 합니다.

     

    로마로마로마
    로마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말라리아'란 이름

    이렇게 오랜 역사 동안 이탈리아에서의 큰 유행으로, '말라리아'라는 이름 역시,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나쁘다는 뜻의 'Mal'과 공기를 뜻하는 'Aria'가 합쳐져, '나쁜 공기'를 뜻하는 'malaria'가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사람들은 모기가 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늪에서 발생하는 나쁜 공기를 원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대항해 시대가 가져온 치료의 실마리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계기는 다름 아닌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아메리카가 발견되며 예수회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페루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페루 인디언들의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페루에서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이미 '신코나 나무(Cinchona)껍질로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민간요법이 있었습니다. 예수회 사람들은 이 인디언들로부터 나무껍질의 치료력을 알게 되었고, 1630년경 유럽의 말라리아 유행 소식에 이 나무껍질을 유럽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코나 나무의 효능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대항해 시대 덕에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예수회의 나무껍질'로 알려지게 된 것이 시작입니다.

     

    대항해 시대가 가져온 치료의 실마리대항해 시대가 가져온 치료의 실마리대항해 시대가 가져온 치료의 실마리
    대항해 시대가 가져온 치료의 실마리

     

     

    유럽 사회에서의 논쟁

    하지만 유럽 사회는 이 나무껍질의 효능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 효능에 대해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의심스러운 공급자들에 의해 다른 물질들과 뒤섞여 공급되기도 했기에, 이 효능을 증명하기에 더욱 어려움이 있었던 탓도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도 가톨릭 예수회는 '예수회 가루(Jesuit Power)'란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외면받았습니다. 의사들은 의학 전문가가 아닌 신부들이 도입해 온 이 가루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청교도 혁명이 이뤄진 개신교 국가 영국은 종교적 이유로 반감이 심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을 배척하던 영국은 가톨릭 예수회에서 판매하는 이 가루가 달갑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올리버 크롬웰 역시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이 가루의 섭취를 거부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는 말라리아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폐쇄적 유럽 사회의 분위기로 유럽인들은 이 가루의 효능에 대해 논쟁을 거듭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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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닌 역사

     

    왕족의 말라리아를 치료하고 끝난 논란

    아이러니하게 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은 곳은 오히려 종교적 이유로 반감이 심했던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의 로버트 탈보는 젊은 시절 케임브리지에서 약제사의 수습생으로 근무했었는데, 그 당시 우연히 페루의 나무껍질에 대해 배웠었습니다. 그는 이 지식을 이용해 1670년대 영국에 말라리아가 유행일 때, 말라리아약을 만들어내 판매했습니다. 그는 말라리아 특효약이라며 이 약을 팔았는데, 실제로 이 약으로 완치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완치 사례들이 대중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보수적인 영국과 유럽 의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며 무시를 당했지만, 대중들의 입소문은 왕족들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의 찰스 2세의 말라리아를 치료하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황태자의 말라리아도 치료하며 그의 말라리아 치료법은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후에 출판된 그의 책에서 그의 치료법이 밝혀졌는데, 페루 나무껍질을 장미 잎, 레몬주스 그리고 와인과 섞은 약을 처방하는 것이 그만의 말라리아 치료법이었습니다. 탈보의 사후에 이 치료법이 밝혀지며, 페루 나무껍질, 즉 신코나 나무껍질의 효능이 드디어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퀴닌의 분리

    1820년에는 프랑스의 피에르 펠르티에와 조세프 카방투가 공동 연구 끝에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유효 성분인 노란 고체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퀴닌'이라고 명명했고, 이것이 인류 첫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입니다.

    퀴닌의 원리는 혈액 속에 들어온 말라리아 원충이 헤모글로빈을 소화하는 것을 방해한 후, 소화를 못 하는 말라리아 원충이 굶어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의 선구로 알려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몽티옹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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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닌 역사

     

    퀴닌의 제약 역사에서의 의의

    퀴닌은 특히 제약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습니다. 바로, 식물이 함유한 단일성분을 분리해낸 최초의 약이란 점입니다. 약재를 달여서 먹는 것과는 달리, 유효성분만을 분리해 내서 먹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복용의 편의성은 물론, 같은 품질 유효성분을 일정한 양을 먹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의약계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퀴닌은 현대적인 화학 요법의 개념에 근본적으로 이바지하면서 19세기 이후 제약 산업 자체의 출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제약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퀴닌은 전세계 수많은 말라리아 환자들을 구한 중요한 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