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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은 최초의 항생제라는 역사적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이 최초의 항생제 발견 전에 세상은 어땠을까요? 단순한 세균 감염 때문에 많은 사람이 크게 앓거나 죽는 일도 매우 빈번했습니다. 손톱에 의한 세균 감염으로 죽음까지 이르는 일도 있었으니, 현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현대를 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세균감염이 가벼운 질병,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바뀌게 된 첫 번째 시작이 바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칭송받는 이 약이 어떻게 발견되었고, 임상을 거쳐 대량생산에 성공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페니실린의 발견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당시 포도상구균에 의한 심각한 감염병이 발생하던 때였기에 세균 감염증에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실수로 플레밍이 배양접시를 씻지 않고 휴가를 간 후 몇 주 후에 돌아왔을 때, 그는 무언가 배양접시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접시 위에는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주변에는 신기하게도 포도상구균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예방할 수 있는 물질을 분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플레밍은 배양 물질에서 발견된 곰팡이의 이름을 따서,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는 이 곰팡이로 많은 실험을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완벽한 물질을 추출하지 못했고, 이 발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결정적인 이유는 정제가 어려우니 약으로 만드는 것도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항생제가 될 이 물질의 엄청난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고, 이 연구는 더 진행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의 연구 재개
동료 과학자들의 외면을 받았던 플레밍 보고서는 10년 뒤, 옥스퍼드 대학의 화학자 어니스트 체인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의 상사인 하워드 플로리에게 포도상구균을 없앤 이 물질을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플로리도 이 연구에 흥미를 갖고 연구에 동의하면서, 아무도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던 플레밍의 곰팡이 연구는 10년 후에야 옥스퍼드에서 연구가 재개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연구실에서 이 연구는 우선적인 프로젝트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실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생산할 수 있는 양이 감염된 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체인은 단순히 그가 배양하던 곰팡이 배양 추출물의 독성을 검사하기 위해서 두 마리의 쥐에 이것을 주입하기로 했습니다. 실험 전과 실험 후 쥐는 완벽히 건강했습니다. 이 우연한 실험의 성공으로 체인은 플로리의 연구 열의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체인은 자신의 업무를 이 곰팡이 연구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플로리의 열의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구팀이 결성되어 임상시험에 사용하는 충분한 양의 곰팡이를 만드는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동물 실험의 성공
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위한 충분한 양의 곰팡이를 얻기 위해 연구팀은 쟁반, 깡통, 병 등 여러 도구를 활용하여 곰팡이 배양에 힘을 썼습니다. 다행히 연구팀 구성원 중 일원인 생화학자 노먼 히틀리가 드디어 많은 양의 곰팡이 배양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제 과정을 알아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특히 다양한 용기에서 곰팡이를 배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실험하면서 평범한 실내용 변기가 가장 효과적인 용기임을 발견해 내기도 합니다.
1940년 5월, 체인의 연구팀은 처음으로 감염된 동물들을 실험할 만한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실험에는 사람에게 해로운 다른 박테리아인 연쇄상구균이 사용되었습니다. 8마리의 쥐를 같은 용량의 박테리아에 감염시켰고, 1시간 후 그들 중 4마리는 페니실린이 주입되고, 나머지는 치료 없이 비교군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몇 시간 후, 주사를 주입하지 않은 4마리 쥐들은 통증이 시작되어 결국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페니실린이 주입된 쥐들은 모두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실험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임상시험
동물실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공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적용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감염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동물 실험에 쓰는 양의 3,000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플로리가 옥스퍼드의 중요한 기관의 리더였음에도 당시 영국은 전쟁 중이었기에 연구팀이 받을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연구팀은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곰팡이 배양물이 자랄 수 있는 실내용 변기를 닮은 용기까지 고안해가며 대량 생산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게 됩니다.
드디어 1940년, 면도칼에 베여서 급성 패혈증 증상이 나타나는 43세 경찰관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실시하는 인류 첫 페니실린 임상대상자가 됩니다. 결국 첫 번째 환자는 주입 후 병의 호전을 보였음에도 부족한 페니실린의 양으로 사망하게 되지만, 그 후에도 계속 이어진 임상시험들은 페니실린이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진주만 공습과 대량생산의 성공
플로리는 영국 제약회사들의 관심을 끌게 하고자 노력하지만, 전쟁의 상황에서 설득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41년 7월, 플로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제약회사들을 대상으로 대량 생산을 위한 설득에 나섭니다. 마침, 미국은 진주만 공습의 충격으로 부상자 치료를 통한 전력의 보강이 절실했던 때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후 제약회사들이 페니실린의 신속한 대량생산에 협조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인류 첫 항생제의 상용화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 셈입니다. 미국의 협조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대량생산에 이미 성공하여, 연합군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충분한 양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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